AI는 빠르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그러나 사회 전체가 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기술적 특이점을 진심으로 믿는 이른바 ‘특이점주의자’라면 여기서 바로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기술적 특이점’이 가져올 “멋진 신세계”의 대기표를 끊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속도를 의심하는가?
이 글은 “기술적 특이점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 기술적 특이점이 지연되는가”를 묻는다. 그 답이 앞으로의 정책과 사회 토론에 필요한 시간표를 조금 더 정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 AI에는 네 개의 시계가 있다
인공지능 논쟁에는 서로 다른 네 개의 시계가 뒤섞여 있다. 이 시계부터 분리해야 한다.
첫째는 기술적 능력의 시계다. 모델의 매개변수 규모가 커지고 추론 성능이 향상되며 새로운 벤치마크에서 인간을 넘어서는 속도를 잰다.
둘째는 제품 보급의 시계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챗봇과 코딩 도구, 이미지 생성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를 센다.
셋째는 경제적 변혁의 시계다. 기업이 업무를 재설계하고 자본을 재배치하는 시간이다. 생산성과 임금, 고용구조가 실제로 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마지막은 사회적 보편화의 시계다. 부유한 국가의 일부 전문직만 봐서는 안 된다. 저소득 국가와 농촌, 중소기업, 공공기관, 노인과 저학력층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이 혜택을 누리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를 재야 한다.
이 네 시계는 결코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
기술적 성능은 몇 개월 단위로 뛰어오를 수 있다. 소비자용 서비스는 몇 년 만에 수억 명에게 도달할 수 있다.
생산조직과 사회제도, 세계적 생활수준은 훨씬 느리게 변한다.
기술을 인터넷에서 즉시 내려받을 수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병원·학교·공장·법원·행정기관이 그 기술을 곧바로 믿고 쓸 수 있을까?
전혀 다른 문제다.
“AI가 3년 안에 얼마나 똑똑해질 것인가”와 “AI가 3년 안에 세계의 일자리와 생산성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인가”는 완전히 다른 질문이다.
전자는 모델 개발 속도를 묻는다. 후자는 경제와 제도의 전환 속도를 묻는다.
AI 프론티어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주로 첫 번째 시계를 보며 미래를 말한다. 역사학자·경제학자·사회학자는 대개 세 번째와 네 번째 시계를 본다.
어느 쪽이 맞을까? 서로 다른 시간을 말하고 있으니 둘 다 맞을 수 있다. 다만 사회 전체의 변혁을 묻는다면 병목은 모델의 능력보다 사회의 적응 속도다.
2. ‘약 40년’은 법칙이 아니라 기준선이다
“약 40년”이라는 숫자부터 정확히 짚자.
현대 대규모 언어모델의 토대가 된 트랜스포머 논문은 2017년에 발표되었고, 대중이 생성형 AI를 본격적으로 체험하게 된 ChatGPT는 2022년 11월 공개되었다.
트랜스포머의 등장을 기준으로 정확히 40년을 계산하면 2057년이다. ChatGPT를 기준으로 하면 2062년이다.
그러므로 2040~2050년은 엄밀히 말해 40년 뒤가 아니다. 2017년으로부터 약 23~33년, 2022년으로부터 약 18~28년 뒤다.
따라서 기술적 특이점이 2040~2050년에 도래한다는 전망을 “정확히 40년 법칙”이라고 부르면 곤란하다. 다음처럼 말하는 편이 타당하다.
생성형 AI가 등장한 2020년대는 발명과 실험의 시기이고, 2030년대는 조직과 산업의 재설계가 본격화되는 시기이며, 2040년대 이후에야 그 효과가 선진국 경제 전반과 공공제도에 깊숙이 침투할 가능성이 크다. 전 세계적 보편화는 그보다 더 늦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40년이 터무니없는 숫자는 아니다. 국가 간 기술 확산을 연구한 디에고 코민과 마르티 메스티에르는 100개가 넘는 기술의 장기 도입 자료를 분석했다. 기술이 발명된 뒤 각국에서 본격적으로 채택되기까지 평균 약 44년이 지연됐다고 추정했다.
물론 기술마다 차이는 컸다. 인터넷은 몇 년 만에 채택되기 시작했다. 증기선과 철도, 전화, 전기는 여러 나라에 퍼지는 데 수십 년에서 한 세기 이상이 걸렸다.
여기서 “채택”은 모든 국민이 같은 혜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기술이 한 국가에서 통계적으로 관찰될 만큼 쓰이기 시작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렇다면 “전 세계 모든 지역과 계층에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시점”은 언제일까? 지연은 44년보다 더 길어질 수 있다.
40년은 자연법칙이 아니다. 하지만 범용기술이 국경과 조직, 계층을 넘어가는 시간을 가늠하는 역사적 기준선으로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3. 범용기술은 강력해서 느리다
경제학에서는 전기, 증기기관, 컴퓨터처럼 거의 모든 산업에 영향을 주는 기술을 ‘범용기술 (General Purpose Technology)’이라고 부른다.
범용기술은 세 가지 성격을 갖는다.
- 여러 산업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개선되며,
- 그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제품과 공정의 혁신을 연쇄적으로 촉발한다.
AI도 이 조건을 상당 부분 충족한다.
- 언어모델은 글쓰기나 검색에만 쓰이지 않는다.
- 소프트웨어 개발, 고객상담, 교육, 의료기록, 과학연구, 행정, 마케팅, 법률문서, 설계와 제조에까지 적용될 가능성이 있으며,
- 대규모 언어모델을 바탕으로 새로운 제품이나 작업 공정상의 혁신이 시작되고 있다.
쓰임이 이토록 넓기 때문에 AI는 강력하다.
그렇다면 널리 쓰일수록 더 빨리 퍼져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반대다.
용도가 하나뿐인 기술은 기존 조직에 그대로 끼워 넣을 수 있다. 범용기술은 다르다. 업무분장, 정보의 흐름, 책임 소재, 교육과 자격, 관리방식, 공장과 사무실의 구조까지 함께 바꿔야 잠재력이 드러난다.
전기모터를 증기기관 자리에 그대로 놓는 것과 공장 전체를 전기모터에 맞게 다시 설계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직원에게 챗봇 계정을 하나씩 지급하는 것과 기업의 업무흐름·데이터베이스·평가제도·의사결정 구조를 AI에 맞게 다시 만드는 것도 전혀 다른 일이다.
범용기술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가장 혁명적인 기술일수록 그것 하나만으로는 혁명을 일으키지 못한다. 기술 주변의 거의 모든 것을 함께 바꾸어야 하므로, 완전한 효과가 나타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4. 전기는 공장을 다시 지은 뒤에야 힘을 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전기다. 19세기 말에 이미 발전기와 전기모터, 배전시스템이 상용화됐다. 그런데 제조업 생산성은 즉시 폭발하지 않았다.
초기 공장들은 증기기관을 치운 자리에 대형 전기모터 하나를 놓았다. 그 모터는 과거와 똑같이 천장과 벽을 가로지르는 회전축과 벨트에 동력을 공급했다.
증기가 전기로 바뀌었을 뿐 공장의 구조와 작업방식은 그대로였다. 연료비와 유지비는 줄었지만 전기의 진짜 장점은 살리지 못했다.
큰 생산성 효과는 각 기계에 작은 모터를 따로 설치하는 ‘유닛 드라이브’가 퍼진 뒤에야 나타났다. 공장주는 더 이상 중앙 동력축을 중심으로 기계를 놓을 필요가 없었다.
생산공정의 순서에 따라 기계를 배치할 수 있었다. 단층 공장과 조립라인을 만들고 작업공간의 조명·환기·안전도 개선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공장 건물을 새로 짓거나 고쳐야 했다. 관리자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익혀야 했고, 노동자의 역할과 숙련도도 다시 짜야 했다.
기존 공장과 설비의 경제적 수명이 남아 있다면 기업은 곧바로 폐기하지 않았다. 결국 전기의 광범위한 생산성 효과는 초기 상용화로부터 약 30~40년 뒤인 1920년대에야 뚜렷해졌다.
오늘날 많은 기업은 전기 시대의 초기 공장과 비슷하다. 기존 문서작성, 상담, 코딩, 회의 업무를 그대로 둔 채 AI를 보조도구로 덧붙인다.
시간은 조금 아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AI가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생산성 효과는 아니다.
진짜 변혁은 AI가 조직 내부의 정보흐름과 의사결정, 직무의 경계, 서비스 제공방식까지 바꿀 때 일어난다. 그러려면 데이터 정비, 소프트웨어 통합, 보안체계, 책임 규칙, 인력 재교육, 성과평가 방식의 변경이 필요하다.
전기모터가 공장을 바꾸는 데도 수십 년이 걸렸다. 언어와 판단이라는 조직의 중심부를 건드리는 AI의 전환이 단기간에 끝난다고 장담하기는 더 어렵다.
5. 트랙터도 말과 반세기를 공존했다
트랙터는 단순해 보인다. 말이나 소가 끌던 농기구를 내연기관이 끌게 만들면 된다.
그런데 미국 농업에 트랙터가 널리 퍼지는 데는 1910년대부터 1950~1960년대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왜 농민들은 더 좋은 기술을 바로 쓰지 않았을까? 보수성이나 무지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초기 트랙터는 비쌌고 신뢰성이 낮았다. 작은 농장에서는 경제성이 떨어졌다. 수리망과 연료 공급, 적합한 농기계, 금융과 보험도 부족했다.
품질과 가격만 바뀐 것도 아니다. 농장 규모와 노동비용, 도로와 유통망이 함께 변한 뒤에야 대규모 채택이 합리적인 선택이 됐다.
새 기술을 즉시 채택하지 않는다고 언제나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실험실과 시연에서 작동하는 기술이 모든 기업과 개인에게 당장 경제적인 것은 아니다.
AI도 같다. 대기업은 자체 데이터를 정비하고 모델을 맞춤화하며 오류를 감시할 인력을 고용할 수 있다. 소규모 병원·학교·중소기업·지방정부는 그러기 어렵다.
AI가 특정 과제를 인간보다 잘해도 오류 한 번의 비용이나 감시비용이 크면 인간을 남겨두는 편이 합리적일 수 있다. 기술 가격만 낮아져서는 부족하다. 검증, 통합, 보험, 법적 책임까지 포함한 총비용이 충분히 낮아져야 한다.
“AI가 이 일을 할 수 있다”와 “이 일을 AI에게 맡기면 이득이다”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6. 컴퓨터는 한동안 생산성 통계에 없었다
컴퓨터의 역사도 즉각적 변혁론에 제동을 건다. 기업들은 1960~1980년대에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에 막대한 돈을 쏟았다. 그런데 한동안 거시경제 생산성 증가율은 오히려 둔화했다.
경제학자 로버트 솔로가 “컴퓨터 시대는 생산성 통계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보인다”고 지적한 배경이다.
이른바 ‘생산성 역설’이다. 컴퓨터가 쓸모없어서 생긴 일이 아니었다. 기업이 컴퓨터를 제대로 쓸 조직적·인적 자본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
업무를 디지털화하려면 데이터를 표준화하고 부서 간 정보흐름을 바꿔야 했다. 의사결정을 분권화하고 직원의 숙련도도 높여야 했다. 컴퓨터를 사는 비용보다 그 주위의 조직을 다시 설계하는 비용이 더 컸다.
경제학자 에릭 브린욜프슨, 대니얼 록, 채드 시버슨은 이를 ‘생산성 J커브’로 설명한다. 범용기술 도입 초기에는 기업이 막대한 보완투자를 한다. 하지만 공식 통계는 그 투자를 자산이나 산출로 충분히 잡아내지 못한다.
데이터 정비, 직원교육, 업무 프로세스 개발, 시행착오와 조직학습 같은 무형투자가 비용으로만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산성은 처음에 정체하거나 낮아져 보인다. 보완투자의 성과가 쌓인 뒤에야 올라간다.
AI는 이 J커브를 더 깊게 만들 수 있다. 언어모델의 API 사용료보다 내부 데이터를 정리하고 잘못된 답을 감시하는 비용이 더 클 수 있다. 직무를 재설계하고 규정을 바꾸는 비용도 든다.
초기에는 직원이 AI 결과물을 다시 검토하느라 일이 오히려 늘 수 있다. 일부 업무가 빨라지는 만큼 검증·조정·보안 업무가 새로 생긴다.
2020년대 후반까지 거시 생산성 통계에서 AI 효과가 기대만큼 크지 않다고 해보자. 그것만으로 AI가 실패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일부 벤치마크와 시범사업에서 큰 성과가 나왔다고 경제 전체의 J커브가 끝난 것은 아니다.
7. AI는 빠르지만 현실 세계는 느리다
여기서 강한 반론이 나온다. 전기나 증기기관과 AI를 비교하는 것부터 잘못됐다는 주장이다.
AI는 물리적 발전소와 철도망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는 소프트웨어다. 인터넷으로 세계에 즉시 배포할 수 있다. 상당히 맞는 말이다.
ChatGPT 같은 서비스는 과거 어떤 범용기술보다 빠르게 사용자에게 도달한다. 새 모델이 공개되면 전 세계 이용자가 같은 날 접속할 수 있다. 앱 업데이트만으로 기능도 개선한다.
공장 기계를 교체하거나 도로를 건설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하지만 소프트웨어의 배포속도와 사회의 이용속도는 같지 않다.
AI가 바꾸려는 대상에는 병원, 학교, 법률, 제조업, 건설, 운송, 복지, 금융, 공공행정이 들어간다. 이 조직들은 오래된 데이터베이스와 종이문서, 복잡한 책임관계와 규제, 노후한 장비, 수십 년 된 업무관행 위에서 움직인다.
의료진에게 최신 AI 모델을 주는 데는 몇 분이면 된다. 진료기록 시스템과 연동하고 환자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 오진의 책임자를 정하고 보험급여를 결정하며 의료진의 검토절차를 표준화하려면 수년이 걸린다.
AI 교사를 학생에게 제공하는 것은 쉽다. 교육과정·시험·교사평가·개인정보·디지털 격차를 함께 바꾸는 것은 어렵다.
소프트웨어 개발도 예외가 아니다. 기존 코드베이스, 보안 규칙, 테스트 시스템, 고객계약과 품질보증이 제약으로 남는다.
AI가 코드를 빠르게 만들어도 기업은 그 코드가 장기간 유지될지 검증해야 한다. 생성속도가 빨라지면 검토할 코드가 늘어 새로운 병목이 생길 수도 있다.
AI는 디지털 형태로 빠르게 이동한다. 그러나 AI가 닿는 조직과 제도는 여전히 물리적이고 역사적이다.
“모델 접근성”이 빠르다는 사실은 “사회 전환”도 빠르다는 증거가 아니다.
8. AI만 산다고 조직이 바뀌지는 않는다
정보기술과 생산성 연구가 반복해서 보여준 사실이 있다. 기술투자와 조직혁신은 함께 가야 한다.
컴퓨터를 많이 샀다고 생산성이 자동으로 오르지 않았다. 의사결정을 현장에 분산하고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한 기업이 더 큰 효과를 봤다. 직원의 숙련을 높이고 부서 간 협업을 다시 설계한 기업도 마찬가지였다.
AI도 다르지 않다. 잠재력을 온전히 쓰려면 적어도 다음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 데이터의 소유권과 품질부터 정비해야 한다. 많은 기업은 자신의 데이터가 어디에 저장됐는지조차 완전히 모른다. 문서 형식과 용어는 부서마다 다르고 오래된 정보와 최신 정보가 섞여 있다.
이런 데이터를 AI에 연결하면 빠르고 그럴듯한 오류만 대량생산한다.
둘째, 인간과 AI의 역할을 다시 나눠야 한다. 어느 단계까지 AI가 처리하고 언제 인간에게 넘길지 정해야 한다. 결과물을 승인하고 책임질 사람의 권한도 분명해야 한다.
셋째, 성과평가와 보상체계를 바꿔야 한다. 직원이 AI로 업무시간을 절반으로 줄여도 기업이 근무시간과 처리량만 평가한다면 절약된 시간은 새 가치로 이어지지 않는다.
더 많은 업무가 배정되거나 비공식적인 여유시간으로 흡수될 뿐이다.
넷째, 직무와 부서의 경계를 바꿔야 한다. AI가 기획·분석·작성의 일부를 통합하면 기존 부서구조는 비효율적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부서를 통폐합하고 직무기술서와 승진경로를 고치는 일은 기술 업데이트보다 훨씬 어렵다.
다섯째, 실패하며 학습할 여유가 필요하다. AI 프로젝트의 상당수는 기대한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다. 기업은 여러 차례 실험하고 실패한 시스템을 버리며 성공 사례를 키워야 한다.
이 학습은 돈으로 사는 완제품이 아니다. 시간 속에서 쌓이는 경험이다.
결국 AI의 핵심 보완재는 GPU만이 아니다.
잘 정리된 데이터, 새로운 관리기법, 신뢰와 책임의 규칙, 숙련된 직원, 학습하는 조직이 모두 필요하다. 이 자산은 한 번의 모델 출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9. 기술 전환에는 사회의 합의가 필요하다
기계와 제품만 바꾼다고 기술 전환이 끝날까?
사회기술 전환을 연구한 프랑크 힐스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한다. 새로운 기술체계가 자리 잡으려면 이용자의 습관, 산업 네트워크, 규제, 인프라, 문화적 의미가 함께 변해야 한다.
범선과 증기선, 마차와 자동차, 오물통과 근대적 하수도는 오랫동안 공존했다. 새 기술은 낡은 기술을 단번에 밀어내지 못했다.
처음에는 틈새시장에 머물렀다. 기존 제도와 충돌했고 설계와 사업모델을 여러 번 고쳤다. 법률과 도시계획, 보험, 전문직, 이용자의 기대가 함께 변한 뒤에야 새 체제가 지배적이 됐다.
경제사학자 카를로타 페레스도 기술혁명을 두 시기로 나눈다. 발명과 설치의 순간, 그리고 사회 전반에 펼쳐지는 배치의 시기다.
새 기술은 금융투자와 기업가적 실험을 타고 빠르게 확장한다. 하지만 안정된 생산체제가 되려면 사회의 규칙과 제도가 기술에 맞게 조정돼야 한다. 그 사이에는 투기와 과잉투자, 붕괴, 규제개편, 새로운 타협이 나타나곤 한다.
이 틀에서 생성형 AI의 현재는 어디쯤일까? 아직 ‘설치와 탐색’의 초기 단계일 가능성이 크다.
수많은 기업이 제품에 AI 기능을 붙인다. 투자자금은 데이터센터와 모델 기업에 몰리고 사업모델은 경쟁한다. 하지만 어떤 직무배치와 책임구조, 수익모델, 규제체계가 오래 살아남을지는 아직 모른다.
AI가 사회 깊숙이 들어갈수록 정확도만으로 풀 수 없는 질문이 늘어난다.
누가 AI의 결정을 감사할 것인가. 자동화로 절약한 이익은 누가 가져갈 것인가. 교육과 채용에서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인간의 판단을 반드시 남겨야 할 곳은 어디인가.
모델 개발자가 혼자 답할 수 없다. 법원과 의회, 노동조합, 전문직 단체, 시민사회, 소비자와 각국 정부의 협상 속에서 답이 만들어진다.
이 협상은 컴퓨팅 성능처럼 지수적으로 빨라지지 않는다.
10. 노출됐다고 자동화된 것은 아니다
AI 충격이 임박했다는 주장에는 “전체 직무의 몇 퍼센트가 AI에 노출된다”는 수치가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연구자들은 대규모 언어모델이 미국 노동자의 상당수가 수행하는 과제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봤다. 일부 직종에서는 업무시간의 큰 비율을 줄일 잠재력도 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이 연구가 재는 것은 대체로 기술적 노출도다. AI가 이론적으로 어떤 과제의 시간을 줄일 수 있는지를 평가한다.
연구자들 자신도 선을 긋는다. 이것은 실제 개발·채택 일정이나 고용감소 시점을 예측한 수치가 아니다.
노출도와 자동화 사이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AI가 과제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충분히 믿을 수 있고 인간보다 총비용이 낮아야 한다. 기존 시스템과 연결되고 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고객과 직원도 받아들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업이 직무와 인력구조를 실제로 바꿔야 한다.
한 직무의 과제 절반을 AI가 보조하면 그 직업도 절반이 사라질까?
아니다. 남은 절반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 AI를 검토하고 고객과 소통하는 새 과제도 생긴다. 처리비용이 낮아지며 서비스 수요가 늘어 고용이 유지될 수도 있다.
“직무의 80퍼센트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은 “노동자의 80퍼센트가 몇 년 안에 실직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동차가 대부분의 이동에 쓰일 수 있다는 사실과 모든 마차와 철도가 즉시 사라진다는 주장은 다르다.
11. 직업은 사라지기보다 과제로 다시 나뉜다
대런 아세모글루와 파스쿠알 레스트레포가 발전시킨 과제 기반 노동시장 이론은 자동화의 효과를 두 갈래로 나눈다.
기계가 인간의 과제를 맡아 노동수요를 줄이는 ‘대체효과’가 있다. 기술이 새 과제와 산업을 만들어 인간의 노동수요를 회복시키는 ‘복원효과’도 있다.
산업혁명에서 특정 업무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렇다고 경제 전체에서 인간 노동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기계가 생산비를 낮추자 상품수요가 늘었다. 관리·설계·유통·마케팅·유지보수 같은 새 일도 생겼다. 반대로 자동화가 새 과제를 충분히 만들지 못한 시기에는 임금과 노동소득분배율이 악화될 수 있었다.
AI의 노동시장 효과도 두 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큰지에 달려 있다. 기업은 AI를 기존 노동자를 줄이는 데만 쓸 수 있다. 반대로 너무 비싸 제공하지 못했던 서비스를 넓히는 데 쓸 수도 있다.
개인교습, 법률상담, 번역, 소프트웨어, 의료보조의 가격이 낮아지면 새로운 수요와 직무가 생길 수 있다.
문제는 이 조정에 시간이 든다는 것이다.
기존 직원은 재교육을 받고 청년은 새로운 전공을 선택한다. 기업은 새 사업을 시험한다. 임금이 변하고 노동력이 산업 사이를 이동하며, 새 직업분류와 자격제도가 생긴다.
교육기관이 교육과정을 바꿔도 학생 한 세대가 졸업하려면 수년이 걸린다.
일자리 혁명은 어느 날 아침 모든 직업이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다. 과제와 숙련, 임금, 산업구조가 여러 번 다시 배치되는 긴 과정이다.
12. 국소적 향상은 거시적 변혁이 아니다
현장에서는 이미 생산성 향상이 보인다. 고객상담 직원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AI 보조도구는 평균 처리능력을 높였다. 특히 경험이 적은 직원에게 더 큰 도움이 됐다.
글쓰기와 일부 전문업무, 프로그래밍에서도 과업 완료시간이 줄고 품질이 향상된 실험이 보고됐다.
이 결과는 AI가 무용하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그러나 몇 년 안에 경제 전체를 뒤집는다는 증거도 아니다.
첫째, 연구 대상은 AI가 비교적 잘하는 구조화된 과제로 선택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성공 사례는 데이터와 관리체계가 잘 갖춰진 특정 기업에 몰릴 수 있다.
셋째, 개별 과제에서 20퍼센트의 시간을 아껴도 전체 근무시간이나 기업의 총생산이 같은 비율로 바뀌지는 않는다. 절약한 시간이 회의, 검토, 대기, 다른 업무로 흡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덴마크 노동시장을 조사한 2025년 연구를 보자. 생성형 AI 챗봇 도입 뒤 약 2년이 지난 시점까지, AI에 많이 노출된 직업의 임금과 기록된 근로시간에서 통계적으로 뚜렷한 총효과는 발견되지 않았다.
업무내용과 도구 사용은 변했다. 하지만 임금과 고용시간이 곧바로 급격하게 바뀌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아무 영향이 없다는 뜻일까? 아니다.
기술 이용과 거시적 노동시장 결과 사이에 지연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도구를 쓰기 시작했지만 기업의 인사·보상·가격·생산체계는 아직 그 효율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을 수 있다.
13. 거시경제는 CEO의 시간표보다 느리다
AI 기업 경영자들은 수년 안에 대부분의 인지노동이 자동화되거나 경제성장률이 급격히 오를 가능성을 말한다.
거시경제학의 시간표는 훨씬 완만하다.
아세모글루는 현재의 생성형 AI가 향후 10년 동안 미국의 총요소생산성을 약 0.5~0.7퍼센트 높이고 국내총생산을 대략 1퍼센트 안팎 끌어올릴 수 있다고 추정했다.
무시할 효과는 아니다. 그러나 10년 안에 경제질서 전체가 뒤집힌다는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다. AI가 쉽게 자동화할 과제는 전체 경제의 일부이고, 현실의 많은 과제는 상황 의존적이며 검증하기 어렵다.
초기 실험에서 높은 효과가 나온 과제가 측정과 학습이 쉬운 일에 치우쳤을 수도 있다. 법률·경영·의료·교육·대인서비스처럼 복잡하고 책임이 큰 업무에서는 기술적 가능성이 실제 비용절감으로 바뀌는 속도가 더 느릴 수 있다.
물론 하나의 연구일 뿐 확정된 결론은 아니다. AI 성능이 예상보다 빨리 발전하거나 새 과제가 대규모로 자동화되면 효과는 더 커질 수 있다.
그래도 분명한 점은 있다. 3~5년 안의 전면적 혁명이 학계의 유일한 전망은 아니다.
14. 앱을 쓰는 속도와 경제가 바뀌는 속도는 다르다
생성형 AI의 채택속도는 과거 기술보다 매우 빠르다. 미국 조사에서는 2024년 무렵 이미 성인의 상당수가 생성형 AI를 썼다. 적지 않은 근로자도 업무에 활용했다.
이 수치는 점진론을 반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럴까?
휴대전화에 앱을 설치해 가끔 질문하는 것과 기업의 공식 생산공정을 AI 중심으로 다시 짜는 것은 다르다.
소비자는 오류가 나도 큰 피해가 없는 일부터 맡긴다. 여행일정 초안, 이메일 다듬기, 아이디어 발상, 번역, 이미지 생성 같은 용도다.
기업은 고객의 돈과 개인정보, 법적 책임을 다룬다. 틀렸을 때 손해가 크므로 검증절차가 필요하다.
AI는 ‘사용자 수’에서는 빠르게 퍼지면서도 ‘생산성·고용·임금·조직구조’에서는 느리게 퍼질 수 있다. 모순이 아니다.
인터넷도 비교적 빨리 가정에 들어왔다. 그러나 전자상거래·클라우드·원격근무·플랫폼 노동·디지털 정부가 경제 전체를 다시 짜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
기술 확산은 하나의 S자 곡선이 아니다. 여러 겹의 S자 곡선이다.
개인의 체험, 기업의 시험도입, 핵심공정 통합, 제도적 표준화, 세계적 보편화는 서로 다른 시점에 진행된다.
15. 2025년, 다섯 기업 중 넷은 아직 AI를 쓰지 않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2025년 조사 가능한 회원국에서 AI를 쓴다고 답한 기업은 약 20퍼센트였다. 2023년보다 빠르게 늘었지만 여전히 다수 기업은 AI를 공식적으로 쓰지 않았다.
정보통신업과 전문·과학서비스업의 도입률은 높았다. 전통적 서비스업과 건설·운송·소규모 사업체는 훨씬 낮았다.
AI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경제 전체의 전환은 아직 초기다. 두 사실이 동시에 보인다.
대기업과 기술기업에는 컴퓨팅 자원, 데이터, 전문인력, 법무팀이 있다. 실패한 프로젝트를 감당할 자금도 있다.
중소기업은 어떤 도구를 고를지 판단하기 어렵다. 내부 데이터를 디지털화하지 못했고 AI 보안과 규제에 대응할 인력도 부족하다.
평균값은 중요한 격차를 가린다. 상위 기업이 AI로 생산성을 빠르게 높여도 나머지 기업이 따라오지 못하면 국가 전체의 상승은 제한된다.
선도기업의 시장지배력만 더 강해질 수도 있다.
격차를 줄이려면 표준화된 서비스, 교육과 컨설팅, 신뢰할 공급업체, 법률적 명확성, 저렴한 컴퓨팅과 데이터 인프라가 필요하다.
생태계를 만드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16. ‘모든 사람’은 낙관론의 가장 약한 고리다
AI가 미국과 중국, 유럽, 한국과 일본의 도시 전문직에 빠르게 퍼질 수 있다. 그렇다고 인류 전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국제전기통신연합에 따르면 2025년에도 세계 인구 약 22억 명이 인터넷을 쓰지 못했다. 세계 인터넷 이용률은 약 74퍼센트였지만 도시와 농촌, 고소득국과 저소득국 사이의 격차는 컸다.
인터넷이 상용화된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보편적 접속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인터넷에 접속한다고 AI를 충분히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안정적인 전력, 빠른 통신망, 스마트 기기와 컴퓨터, 디지털 결제, 현지 언어 데이터, 기본 문해력과 디지털 숙련이 필요하다.
기업과 정부에는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사이버보안, 전문인력이 필요하다.
세계은행은 국가가 AI의 혜택을 얻을 조건으로 네 요소를 든다. 연결성, 컴퓨팅, 맥락에 맞는 데이터, 역량과 숙련이다.
저소득 국가에서는 네 조건이 모두 부족할 가능성이 크다. AI 인력과 일자리도 고소득 국가에 압도적으로 몰려 있다.
언어 격차도 크다. 영어와 중국어처럼 디지털 자료가 많은 언어는 모델 성능과 서비스가 빨리 좋아진다. 저자원 언어와 방언은 품질이 낮을 수 있다.
현지의 법률·문화·의료·교육 맥락을 담은 데이터가 부족하면 AI는 그럴듯하지만 부적절한 조언을 내놓는다.
역설이 생긴다. AI의 혜택을 얻으려면 사회가 이미 상당한 디지털화와 행정역량을 갖춰야 한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지역이 가장 늦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AI는 초기에는 세계적 격차를 줄이기보다 키울 가능성도 있다.
“모든 지역과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시점”을 묻는다면 2040~2050년조차 낙관적일 수 있다.
17. 느리게 움직여야 하는 곳도 있다
기술기업에서는 속도가 미덕이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도 그럴까?
아니다. 병원과 법원, 복지기관, 학교, 군대, 금융기관은 잘못된 결정의 피해가 크다. 그래서 새 기술을 의도적으로 천천히 검증한다.
의료 AI가 평균적으로 의사보다 정확해도 특정 연령·인종·질환 집단에 오류가 몰릴 수 있다. 채용 AI는 과거 데이터의 차별을 되풀이할 수 있다.
복지급여 심사나 범죄위험 평가가 틀리면 개인의 삶이 직접 훼손된다.
이 분야에서는 평균 성능만 좋아서는 안 된다. 오류의 분포, 설명 가능성, 이의제기 절차, 감사기록, 개인정보 보호를 살펴야 한다. 장애 발생 시의 대안, 책임보험과 법적 책임도 갖춰야 한다.
제도가 신중한 것은 단순한 관료주의가 아니다. 사회가 치러야 할 안전비용이다.
AI가 강해지면 검증은 줄어들까? 단정할 수 없다.
시스템이 더 많은 권한을 가질수록 실패의 영향도 커진다. 사회는 더 높은 신뢰성을 요구할 수 있다. 모델 성능 향상과 규제 완화는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공공조달도 느리다. 정부는 예산주기와 입찰, 감사, 법률검토를 거친다. 노후 시스템과 새 AI를 합치는 데는 수년이 걸린다.
민주사회에서는 시민의 동의와 정치적 정당성도 필요하다.
민간 소비자용 AI가 빠르게 발전해도 사회의 핵심제도는 같은 속도로 자동화되기 어렵다. 느림이 필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18. 자본과 숙련은 다운로드할 수 없다
경제의 상당 부분은 이미 설치된 자본과 축적된 숙련으로 이뤄진다. 공장, 사무실, 병원 장비, 소프트웨어, 계약, 교육과정, 전문자격은 모두 수명이 길다.
새 기술이 더 뛰어나도 기존 자산을 즉시 버리면 막대한 손실이 난다.
기업은 기존 시스템의 교체주기가 돌아올 때 새 기술을 들이는 경우가 많다. 직원도 하루아침에 새 직업으로 옮기지 않는다. 기존 숙련과 임금, 가족과 지역, 자격증과 경력을 따진다.
조직은 퇴직과 신규채용, 승진을 거치며 세대 단위로 바뀐다.
이 ‘교체의 마찰’은 AI가 아무리 빨리 발전해도 남는다.
AI가 특정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된 날과 기업이 기존 인력을 줄이는 날 사이에는 계약과 노사관계, 조직지식, 고객신뢰가 놓여 있다.
기존 직원은 공식 직무기술서에 없는 암묵지를 가진다. 어떤 고객에게 예외를 적용해야 하는지 안다. 오래된 시스템의 오류를 우회하는 법과 조직 안에서 누구와 협의해야 일이 되는지도 안다.
AI가 문서상 업무를 자동화해도 이런 암묵지를 즉시 대신하지 못할 수 있다.
기술교체의 속도는 성능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기존 자산이 얼마나 빨리 감가상각되는지, 새 세대가 얼마나 빨리 들어오는지도 결정한다.
그래서 사회 전체가 바뀌는 데 종종 한 세대가 걸린다.
19. 기술이 너무 빨라도 기업은 기다린다
모델 성능이 빨리 좋아지면 기업도 빨리 도입할 것 같다. 그런데 기술이 너무 빨리 바뀌면 오히려 기다릴 이유가 생긴다.
오늘 큰돈을 들여 특정 모델에 맞춘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해보자. 6개월 뒤 더 강력하고 저렴한 모델이 나오면 투자는 너무 일찍 낡는다.
공급업체와 표준이 자주 바뀌면 장기계약도 어렵다. 기술경쟁의 승자가 정해질 때까지 대규모 투자를 미루는 편이 합리적일 수 있다.
모델 능력이 계속 변하면 규제기관도 고정된 규칙을 만들기 어렵다. 오늘의 위험평가가 내년 모델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
기업은 법률과 표준이 정리될 때까지 핵심업무 자동화를 미룬다.
빠른 발전은 실험과 소비자 이용을 밀어붙인다. 동시에 장기적인 조직통합에는 불확실성을 만든다.
기술의 지수적 발전과 사회적 채택의 점진성은 함께 나타날 수 있다.
20. 3~5년 안에 바뀌는 것, 바뀌지 않는 것
점진론은 앞으로 3~5년 동안 아무 일도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특정 영역에서는 상당히 큰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코딩, 번역, 광고문안, 고객상담, 문서요약, 검색, 일러스트 초안처럼 결과를 빨리 검토할 수 있는 업무에서는 AI 사용이 표준이 될 수 있다. 일부 신입직과 외주업무의 수요가 줄고 소수 인력이 더 많은 산출을 맡을 수 있다.
교육과 채용의 AI 사용 규칙도 빠르게 바뀔 것이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전력 투자는 특정 지역경제와 기업가치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렇다고 경제 전체의 일자리 구조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3~5년은 선도기업과 특정 직무의 충격이 보이는 기간일 수 있다. 병원·학교·정부·제조·건설·운송을 포함한 사회 전체가 다시 짜이기에는 짧다.
2030년대에는 AI를 보조도구가 아니라 업무체계의 중심에 둔 신생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 기존 대기업도 데이터와 조직을 본격적으로 다시 짤 가능성이 있다.
직무교육과 전문자격, 관리방식이 AI에 맞게 변하며 노동시장 조정도 커질 수 있다.
2040년대에는 2020년대에 시작된 투자의 보완자본이 성숙한다. AI에 익숙한 세대가 조직의 관리자와 정책결정자가 된다.
이때야 선진국의 생산성과 공공서비스, 산업구조 전반에서 AI 효과가 뚜렷해질 가능성이 있다.
저소득 국가와 농촌, 영세기업까지 포함한 세계적 보편화는 2050년대 이후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 연대는 예언이 아니다. 역사적 패턴을 토대로 한 시나리오다.
21. CEO는 첫 번째 시계를 본다
AI 기업 경영자들이 거짓말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관찰한 현실을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을 수 있다.
다만 그들이 보는 표본은 사회 전체와 다르다.
프론티어 연구소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 컴퓨팅 자원, 자본, 데이터와 기술문화가 밀집해 있다. 새 모델이 나오면 즉시 내부 업무에 적용한다. 직원 대부분은 디지털 숙련이 높고 실패한 실험을 감당할 돈도 있다.
이곳에서 본 변화속도를 지방정부, 중소병원, 학교, 가족농장, 저소득 국가에 그대로 적용하면 체계적인 오류가 생긴다.
기업경영자는 투자자와 인재, 고객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임박한 변혁을 강조할 경제적 유인이 있다.
기술이 사회 전체에 퍼지는 데 20년이 걸린다는 메시지는 자금조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CEO의 전망을 버려도 될까? 그럴 수 없다. 이들은 기술적 능력의 최전선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다.
다만 그들의 정보는 첫 번째 시계, 곧 모델 능력의 발전을 예측하는 데 강하다. 제도와 노동시장, 세계적 보급의 시계를 읽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모델이 얼마나 빨리 발전할지는 AI 연구자가 잘 알 수 있다.
병원이 얼마나 빨리 구매절차를 바꾸고 법원이 책임법리를 만들지는 다른 문제다. 학교가 교육과정을 고치고 저소득 국가가 전력망을 넓히는 속도도 다른 전문지식의 영역이다.
22. 그래도 이번에는 다를 수 있다
점진론의 가장 강한 약점은 분명하다.
이번 기술은 과거와 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
첫째, AI는 AI 개발 자체를 가속할 수 있다. 코딩과 연구, 반도체 설계를 자동화하면 기술발전이 자기강화적으로 빨라질 수 있다.
둘째, 소프트웨어는 복제의 한계비용이 매우 낮다. 한 번 개발된 시스템을 전 세계에 배포하기 위해 공장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다.
셋째, 언어는 거의 모든 지식노동의 공통 인터페이스다. 자연어로 명령할 수 있는 AI는 과거의 복잡한 기업용 소프트웨어보다 학습비용이 낮을 수 있다.
넷째, 클라우드와 스마트폰, 인터넷이라는 기반시설이 이미 존재한다. 전기나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와 달리 AI는 기존 글로벌 디지털망을 이용할 수 있다.
다섯째,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자율형 에이전트가 등장하면 단순한 보조도구를 넘어 업무의 연속된 단계를 수행할 수 있다. 로봇공학과 결합하면 물리적 노동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 반론들은 진지하다. AI가 과거 평균보다 빠르게 퍼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40년은 상한선도, 반드시 기다려야 할 기간도 아니다.
그럼에도 같은 혼동이 다시 나타난다. 기술적 능력과 사회적 변혁을 한 속도로 보는 오류다.
AI가 연구를 가속해도 법률과 정치, 신뢰, 자본교체가 같은 비율로 빨라지지는 않는다. 소프트웨어는 복제해도 양질의 현지 데이터와 조직역량은 복제하기 어렵다. 자연어 인터페이스가 쉬워도 결과를 검증할 전문성은 필요하다.
더 강한 AI가 나오면 도입이 빨라질 수 있다. 동시에 사회가 느끼는 위험과 갈등이 커져 규제와 저항도 강해질 수 있다.
기술적 가속은 사회적 가속으로 1대1 변환되지 않는다.
23. 역사가 허락하는 시간표
역사는 미래의 달력이 아니다. 그래도 어떤 시간을 구분해야 하는지는 알려준다.
첫째, 2020년대는 능력의 급진적 향상과 시험도입, 자본집중의 시기일 가능성이 크다. 일부 직무와 산업에서는 이미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경제 전체의 생산성과 고용이 즉시 다시 짜이지는 않을 수 있다.
둘째, 2030년대에는 보완투자와 조직재설계가 쌓일 가능성이 크다. 처음부터 AI에 맞게 설계된 기업과 서비스가 성장하고 기존 기업의 구조조정과 직무변화가 본격화될 수 있다.
노동시장 갈등과 교육개혁, 새로운 규제도 중요한 정치 의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 2040년대에는 AI가 선진국의 일상적인 사회기반기술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오늘날 전기나 인터넷을 매번 특별한 혁신이라 부르지 않듯, AI도 거의 모든 조직의 배경에 존재할 수 있다.
생산성 효과도 시범사업이 아니라 거시통계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넷째, 2050년대 이후에도 세계적 격차는 남을 수 있다. 전력과 통신, 교육과 행정역량이 약한 지역에는 AI의 혜택이 늦게 도착할 수 있다.
외국 기업에 의존하는 형태로만 제공될 수도 있다.
이를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특정 과제와 선도산업의 변화에는 3~5년, 선진국 기업과 노동시장의 광범위한 재편에는 10~20년, 공공제도와 전 세계적 보편화에는 20~40년 이상이 걸릴 수 있다.
이 시간표는 AI의 능력을 낮게 봐서 나온 것이 아니다.
AI가 진정한 범용기술이기에 바꿔야 할 범위도 넓다고 보는 것이다.
24. 결론: 혁명은 빠르고 변혁은 느리다
AI 논쟁은 두 극단으로 흐르기 쉽다.
한쪽은 몇 년 안에 인간의 일 대부분이 자동화되고 경제성장률이 폭발한다고 말한다. 다른 쪽은 지금의 AI가 과장된 챗봇에 불과하며 곧 거품이 꺼진다고 말한다.
나는 제3의 가능성이 역사에 더 가깝다고 본다.
AI는 전기와 컴퓨터에 비견할 범용기술일 수 있다. 수많은 직무와 산업, 인간의 지식생산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잠재력도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완전한 효과가 나오기까지 오래 걸릴 수 있다.
발명은 연구소에서 일어난다. 변혁은 조직과 제도에서 일어난다.
모델은 몇 달 만에 훈련된다. 숙련은 세대에 걸쳐 쌓인다. 소프트웨어는 순식간에 복제되지만 신뢰와 법률, 인프라는 다운로드할 수 없다.
기술의 성능은 지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 공장과 학교, 병원, 정부와 사람의 삶은 지수적으로 재편되지 않는다.
전기는 19세기 말에 등장했지만 20세기 초 공장이 다시 설계된 뒤에야 거대한 생산성 효과를 냈다. 트랙터는 수십 년 동안 말과 함께 일했다.
컴퓨터는 오랫동안 생산성 통계에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은 상용화된 지 30년이 넘은 오늘날에도 전 인류에게 보급되지 않았다.
이 역사를 생각하면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사회 전체의 변화는 10~2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의견은 기술에 대한 무지가 아니다. 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보는 역사적 현실주의다.
“인류 전체가 AI의 혜택을 누리는 시점은 2040~2050년 이후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다만 정확한 40년의 법칙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여러 범용기술에서 반복된 수십 년 규모의 확산지연을 적용한 시나리오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AI가 언제 인간보다 똑똑해지는가만이 아니다.
누가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가. 어떤 조직이 효과적으로 흡수하는가. 이익과 위험은 어떻게 나뉘는가. 뒤처진 지역과 계층을 어떤 제도가 보호하는가.
AI의 기술적 미래는 연구소에서 결정될 수 있다. 그러나 AI가 만들 사회의 미래는 수십억 명의 사람과 수백만 개의 조직, 수많은 법과 제도가 함께 적응하는 속도로 결정된다.
발명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변혁은 지금까지 언제나 발명보다 느렸다.
DISCUSSION
댓글과 반응
GitHub 계정으로 로그인하면 댓글과 반응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