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게이머는 절반인데 시장은 왜 남성을 보는가
여성 게이머는 거의 절반이다.
그런데 여성향 대작은 드물다.
이 불균형은 어디에서 생겼을까?
세상의 절반은 여자다. 모바일 퍼즐 게임을 하든, 생활 시뮬레이션을 하든, 콘솔 액션이나 PC 경쟁 게임을 하든 모두 여성 게임 이용자다.1

서브컬처 게임 시장으로 들어가면 풍경이 달라진다.
여성 캐릭터의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한 의상, 신체의 흔들림을 부각하는 연출, 특정 부위를 집요하게 확대하는 장면은 흔하다.
반면 여성 이용자의 취향과 욕망을 앞세운 대규모 수집형 게임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소외감을 느낀 여성 이용자라면 자연스럽게 묻는다. 왜 게임업계는 세상의 대부분이 남성인 것처럼 행동하는가?
일부 여성 커뮤니티의 답은 비교적 단순하다. 게임을 만들고 투자하는 사람이 대부분 남성이어서 여성의 취향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상품을 파는 일보다 다른 남성 이용자에게 인정받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을 더 중시한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현실을 찌르는 설명이다. 게임업계의 남초 조직문화와 성별 편견, 여성 종사자와 이용자가 겪어 온 배제를 모두 피해의식이나 망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성향 게임의 부족과 여성 서브컬처 이용자의 소외를 전부 남성 개발자의 여성혐오로 설명하면 중요한 것이 사라진다. 게임산업을 움직이는 자본과 투자 구조, 소비 자료와 공급의 역사다.
반대편도 틀린다. 기업의 선택을 모두 ‘시장 논리’로 정당화하며 성차별과 문화적 배제를 없던 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증오와 무지는 다르다. 무지와 관성도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증오와 무지, 관성과 이해관계가 얼마든지 함께 작동할 수 있다. 이 층위를 구분해야 “왜 여성 게이머는 많은데 여성향 대작은 적은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다.
먼저 용어를 분명히 하자. 이 글의 ‘여성향 게임’은 단순히 여성 이용자가 많이 하는 게임이 아니다.
여성을 주요 고객으로 상정하고 남성 캐릭터와 관계 서사, 여성 주인공의 경험과 욕망을 상품 중심에 둔 게임을 뜻한다.
여성 게이머가 많다는 사실과 여성향 게임이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는 주장은 같지 않다.
게임산업은 하나의 시장이 아니다. 모바일 퍼즐 게임, 생활 시뮬레이션, PC MMORPG, 콘솔 액션, 스포츠 게임, 연애 시뮬레이션과 수집형 RPG를 모두 ‘게임’으로 묶을 수는 있다.
하지만 고객층과 이용 목적, 소비 방식은 크게 다르다.

여성 게이머가 많다고 모두 남성 캐릭터를 수집하며 매달 돈을 내는 대형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잠재 고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소비자 조사이므로 한국 시장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다. 다만 전체 게임 이용자의 성비와 특정 장르의 핵심 고객 성비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은 보여준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게임을 한다고 모두 미소녀 캐릭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스포츠나 전략 게임만 즐기는 사람도 있다. 게임 안에서 캐릭터를 돈 주고 사는 행위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기업이 확인하는 것은 ‘게임을 하는 사람’의 숫자만이 아니다.
목표 고객이 해당 장르와 소재를 좋아하는지, 얼마나 자주 접속하는지, 캐릭터와 장비에 얼마를 쓰는지를 본다. 새 콘텐츠가 나왔을 때 돌아오는지, 몇 년 동안 서비스를 유지할 만큼 오래 남는지도 본다.
게임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과 특정 게임에 오래 돈을 낼 사람은 전혀 다른 고객이다.
여성 이용자가 전체 게이머의 절반에 가깝다는 사실은 여성이 게임시장의 중요한 소비자임을 증명한다.
그렇다고 여성향 대형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사업성까지 자동으로 증명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여성향 대작이 적은 이유는 결국 수요가 작아서일까?
답하려면 지금의 매출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봐야 한다.
매출표는 중립적인가: 시장·표현·조직이 만드는 순환
한국 게임산업의 중심에는 모바일게임이 있다.

기업이 수익성을 확인한 모바일 라이브 서비스와 게임 내 결제 모델을 반복하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기업은 수익을 목적으로 움직이고, 투자자는 과거의 성공 자료로 다음 프로젝트를 고른다.
하지만 매출 그래프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기업이 어떤 상품에 투자했는가. 누구에게 광고했는가. 어떤 캐릭터와 콘텐츠를 반복해서 공급했는가.
그 선택이 오랜 시간 쌓인 결과다.
남성 이용자를 겨냥한 게임이 많아지면 그 장르에는 남성 이용자가 더 모인다. 여성 캐릭터와 남성 취향의 상품이 잘 팔렸다는 자료가 쌓인다. 투자자는 그 자료를 보고 다시 남성향 게임을 고른다.
불편함을 느낀 일부 여성 이용자는 떠난다. 아예 들어오지 않기도 한다.
기업은 남은 이용자의 성비와 매출을 보고 “이 장르에는 원래 여성이 없다”고 판단한다.
여성 이용자가 적어서 남성향 게임이 만들어진 것일까? 남성향 게임만 반복해서 여성 이용자가 적어진 것일까?
쉽게 가를 수 없다. 두 현상이 서로를 강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성 고객을 위한 상품이 적으면 관련 매출도 작게 찍힌다. 자료가 부족하면 투자자는 여성 시장을 위험하게 본다.
투자가 줄면 게임의 규모와 품질이 제한된다. 작은 예산의 게임이 실패하면 그 결과는 다시 여성 시장 전체의 한계로 기록된다.
큰 투자를 받은 남성향 게임이 실패하면 평가는 다르다. 남성 시장 자체보다 그 작품의 기획이나 운영이 실패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여성향 게임 하나의 실패는 시장 전체로 일반화하고 남성향 게임 하나의 실패는 개별 작품 탓으로 돌린다.
공정한 비교가 아니다.
매출표의 숫자는 객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 그 숫자를 쌓을 기회가 주어졌는지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여성향 시장은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블루오션일까?
그렇게 단정할 수도 없다.
아무도 장사하지 않는 골목이 반드시 숨겨진 황금 상권은 아니다. 고객이 부족해 비었을 수 있다. 고객은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팔지 몰라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 골목일 수도 있다.
남성향 서브컬처 시장도 경쟁이 치열하다. 조용히 사라지는 게임이 많다.
그래도 오랫동안 수많은 작품이 나왔기에 성공과 실패의 기록이 풍부하다. 누가 어떤 캐릭터에 돈을 썼고 어떤 운영에 반응했는지, 무엇 때문에 떠났는지를 설명할 자료가 쌓여 있다.
여성향 시장이 본질적으로 더 복잡한 것은 아니다. 여성의 취향이 남성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차이는 축적된 학습량이다.
비교할 투자와 장기 운영 사례가 적으면 투자자는 그곳을 ‘경쟁자가 없는 기회의 땅’보다 ‘성공과 실패를 설명하기 어려운 시장’으로 본다.
물론 기업도 틀린다. 여성 소비자의 구매력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 충분한 상품을 내놓지 않아 생긴 낮은 매출을 여성 소비자의 본래 성향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남성 캐릭터를 거의 내놓지 않은 게임에서 그 매출이 낮게 나왔다고 해보자. 그것만으로 “여성은 캐릭터에 돈을 쓰지 않는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제대로 팔아 보지도 않은 상품의 판매량이 낮다고 말하는 셈이다.
여성 이용자는 캐릭터와 디지털 상품에 돈을 쓰지 않는다는 주장도 현실과 맞지 않는다.
2024년 출시된 여성향 연애·액션 게임 《러브앤딥스페이스》는 강력한 반례다.

성공작 하나가 모든 여성향 게임의 흥행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남성향 게임도 수없이 나오지만 크게 성공하는 작품은 일부뿐이다.
《러브앤딥스페이스》가 증명한 것은 더 제한적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여성을 주요 고객으로 설계한 대규모 게임에도 실제 수요가 있다. 여성 고객도 캐릭터와 관계 서사, 디지털 경험에 상당한 금액을 낸다.
이제 “여성은 게임에 돈을 쓰는가”라는 질문은 버려야 한다.
어떤 여성 고객이, 어떤 게임에, 어떤 이유로 돈을 쓰는가. 무엇을 상품으로 받아들이는가. 그렇게 물어야 한다.
기업이 여성 소비자를 하나의 구체적인 고객 집단으로 충분히 세분화하고 연구했는지도 검토해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성적 대상화와 이어진다.
비현실적으로 강조된 신체와 노출이 많은 의상, 가슴과 엉덩이의 흔들림을 부각하는 연출은 일부 여성 이용자에게 진입장벽과 소외감을 준다.
그렇다고 이유를 제작자 개인의 여성혐오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동시에 특정 고객의 관심과 구매 욕구를 겨냥해 설계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2022년 발표된 국내 연구에서는 여성 캐릭터의 관능적인 디자인 요소를 선호할수록 게임 플레이 의향도 높아지는 관계가 나타났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호감은 남성일수록, 주로 하는 게임에 대한 몰입도가 높을수록, 게임 내 성인지 감수성이 낮을수록 높게 나타났다.
모든 남성이 성적인 여성 캐릭터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성적인 디자인이 반드시 매출을 올린다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기업이 일정한 소비자 선호와 유입 효과를 기대하며 이런 표현을 상품 전략으로 쓸 수 있다는 점은 보여준다.
여기서는 문화와 시장이라는 두 층위를 구분해야 한다.
문화적으로는 왜 여성의 몸이 반복적으로 남성의 시선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묘사되는지, 그런 표현이 여성 이용자를 어떻게 소외시키는지, 여성 캐릭터가 인격을 가진 인물보다 신체 부위의 집합처럼 소비되고 있지는 않은지를 물을 수 있다.
시장 차원에서는 기업이 왜 그런 표현을 반복하는지, 과거에 일부 소비자의 관심과 구매 의향을 높인 상품을 상대적으로 위험이 적은 선택으로 판단한 것은 아닌지를 물어야 한다.
두 설명은 동시에 참이다.
성적 대상화는 일부 여성 이용자를 소외시키는 문화적 문제다. 동시에 특정 소비자의 욕망을 겨냥한 상업적 상품이다.
상업적 목적이 있다고 비판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해 어떤 집단의 불편과 이탈 가능성을 감수했다면 그것도 기업의 선택이다.
2009년 미국 대학생 328명을 세 집단으로 무작위 배정한 실험에서는 성적으로 묘사된 여성 주인공을 플레이한 여성 참여자의 자기효능감에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났다. 다만 이는 단기 실험 결과이므로 실제 게임의 장기 이용이나 여성 이용자의 대규모 이탈을 직접 증명하는 자료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표현을 평가하는 일과 제작자의 내면을 추측하는 일도 갈라야 한다.
“나는 이 상품이 불쾌하다”는 정당한 평가다. “이 표현이 일부 여성 이용자를 소외시킬 수 있다”는 주장도 연구와 이용자 경험으로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므로 이 상품을 만든 사람은 개인적으로 여성을 싫어한다”는 결론에는 별도의 근거가 필요하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증오가 없다고 결과까지 성차별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성을 미워하지 않는 조직도 여성 이용자의 관점을 빠뜨린 채 여성에게 불리한 표현과 문화를 반복할 수 있다.
성차별적인 결과는 노골적인 악의 없이도 태어난다.
게임업계의 남초 조직문화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게임을 만들고 결정하는 사람이 주로 남성이라면 남성의 경험과 취향이 기준이 되기 쉽다.
회의실의 사람들이 비슷한 게임을 하고 비슷한 커뮤니티를 보며 자랐다면 여성 이용자가 무엇을 좋아하고 불편해하는지 놓칠 가능성도 커진다.
여성 고객을 위한 아이디어는 충분한 검토보다 “그게 정말 돈이 되겠느냐”는 의심부터 받을 수 있다.

국내 연구도 여성 개발자의 비가시성과 배제를 보고했다. 2021년 여성 게임 개발자의 노동 경험을 다룬 질적 연구는 창조적인 역할이 성별에 따라 나뉘는 현상과 잘 드러나지 않는 배제 관행을 지적했다.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 개발자는 기술적 능력까지 낮아진 것으로 간주됐다. 이를 근거로 조직 내부의 배제가 정당화되는 경향도 보고됐다.
질적 사례 연구이므로 업계 전체의 비율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여성 개발자가 현장에서 마주할 수 있는 조직문화의 구체적인 모습은 보여준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와 웹툰 작가 배제 사건도 있다. 여성 작가들이 페미니즘 관련 글을 공유하거나 지지를 표시했다는 이유로 온라인 괴롭힘과 퇴출 요구를 받았고, 실제로 작품 사용이 중단됐다.
일부 회사는 소비자의 불매운동과 반응을 고려한 경영상 판단이었다고 설명했다. 인권위의 판단은 달랐다.
이윤 추구가 기업의 목적이라 해도 소비자의 요구가 인권과 정의 같은 기본적 가치에 어긋난다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 사례는 시장 논리와 성차별이 언제나 대립하는 별개의 힘이 아님을 보여준다.
기업이 매출을 이유로 차별적인 고객 요구에 순응하면 시장 논리와 성차별은 서로를 강화한다.
그러니 업계의 성차별을 말하는 여성의 문제 제기를 모두 피해의식이나 에코 체임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실제 배제와 차별은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남성 개발자가 돈보다 다른 남성의 인정을 중시한다고 단정하는 순간 산업 분석은 성별 성격론으로 돌아간다.
대규모 게임은 개발자 한 명의 취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프로듀서와 경영진, 투자자와 퍼블리셔, 마케팅 부서가 사업성을 검토한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프로젝트를 단지 동료 남성에게 멋있어 보이려고 만든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개인의 편견은 작품에 영향을 준다. 남성 경영진이 여성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업 전체의 행동을 “남자들은 감정적이어서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게임만 만든다”고 설명하면 같은 오류를 반복한다. 여성을 하나의 감정적인 집단으로 묶는 편견과 구조가 같다.
남성을 모두 여성혐오자나 인셀로 묶는 설명이 부정확한 것처럼, 여성을 모두 게임에 돈을 쓰지 않는 소비자로 묶는 설명도 부정확하다.
여성 이용자의 요구를 도덕적 불평으로만 보는 태도도 고쳐야 한다.
남성 이용자가 성적인 여성 캐릭터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요라고 해보자. 그런데 여성 이용자가 남성 캐릭터를 더 보고 싶다거나 여성 캐릭터에게 다양한 의상과 역할을 달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 검열일까?
공정하지 않다.
남성 캐릭터를 원하는 요구도 소비자의 취향이다. 남녀 캐릭터가 함께 등장하는 게임을 원하는 요구도 그렇다. 특정 연출 때문에 게임을 사지 않거나 플레이를 그만두는 선택도 시장 행동이다.
모든 비판이 법이나 규정으로 표현을 금지하자는 요구는 아니다. 어떤 이용자는 자신이 살 만한 다른 선택지를 원할 뿐이다.
남성향 게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도 그곳에만 투자가 몰리는 시장은 비판할 수 있다.
특정 취향의 상품이 존재할 자유와 다양한 취향의 상품이 등장할 기회는 양립한다.
다만 팬덤의 가시성과 실제 게임 매출도 구분해야 한다.
일부 여성 중심 팬덤은 굿즈 구매와 팬 창작, 오프라인 행사와 입소문에서 눈에 띈다. 게임사가 여성 팬이 만든 홍보 효과와 팬덤의 활력은 누리면서 게임 안에서는 여성 이용자를 위한 캐릭터와 콘텐츠를 충분히 주지 않는다는 비판에는 타당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굿즈를 사는 것과 게임 안에서 결제하는 것은 다른 행동이다.
인형이나 아크릴 스탠드는 돈을 내면 물건이 남는다. 확률형 상품은 원하는 캐릭터나 장면을 얻는 데 얼마가 들지 알 수 없다.
팬아트를 그리는 사람과 매달 게임에 결제하는 사람도 반드시 같지 않다. 커뮤니티에서 목소리가 큰 집단과 실제 매출을 만드는 집단도 어긋날 수 있다.
이는 여성 팬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성 커뮤니티의 인기 투표와 실제 매출 순위도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기업이 팬덤의 목소리와 실제 구매 자료를 구분하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여성 소비자에게만 유독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느냐다.
남성 고객의 욕망은 자료가 부족해도 잠재 수요로 인정한다. 여성 고객은 큰 매출을 만든 뒤에야 고객으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출발 조건부터 같지 않다.
“남녀 캐릭터를 모두 매력적으로 만들면 되지 않나?”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
다양한 고객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게임은 한쪽을 선명하게 겨냥한 게임보다 설계와 운영이 어려울 수 있다.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와 남성 캐릭터를 꾸준히 내놓아야 한다. 어느 한쪽도 오래 소외됐다고 느끼지 않도록 출시 비율과 서사 비중도 조절해야 한다.
캐릭터의 성별과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전투와 탐험, 세계관도 필요하다.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진 팬덤이 같은 공간에서 충돌할 때 이를 조정할 운영 능력도 요구된다.
남성 캐릭터 몇 명을 더한다고 여성 이용자가 자동으로 늘지는 않는다. 여성 캐릭터의 노출을 줄인다고 곧바로 혼성 이용자를 위한 게임이 되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서로 다른 고객이 같은 세계에 애착을 느끼도록 전체 경험을 설계해야 한다.
어렵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양한 이용자를 초기 기획부터 실제 고객으로 포함하면 더 넓은 시장을 만들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원하는 게임이 있으면 여자들이 직접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반문도 나온다.
산업의 현실을 생략한 말이다.
몇 명의 개발자가 원하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드는 일과 수십만 명을 상대로 몇 년간 운영할 게임을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르다.
개발 인력뿐 아니라 투자금과 광고비, 유통망과 서버 비용, 장기간 업데이트를 이어 갈 운영 자금이 필요하다.
여성 개발자가 여성향 게임을 만들고 싶어도 투자자를 설득하지 못하면 프로젝트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예산이 작으면 캐릭터와 콘텐츠의 규모가 제한되고, 마케팅 비용이 부족하면 게임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리지 못한 채 사라질 수 있다.
그 결과만 보고 “역시 여성향은 돈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면 성급하다.
충분한 투자를 받은 남성향 대작과 작은 예산으로 출발한 여성향 게임은 같은 조건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성 개발자가 만능 해답은 아니다. 여성 개발자라고 여성 전체의 욕망을 아는 것은 아니다.
각자 좋아하는 장르와 취향이 다르다. 회사가 정한 목표와 기획에 따라 남성향 게임을 만들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제작자의 성별 하나가 아니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 실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가. 소비자의 요구를 자료로 모으는가. 기존 성공작과 다른 시도도 공정하게 검토하는가.
여성 개발자가 늘면 이런 변화를 촉진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 직원을 채용하는 것만으로 시장 분석과 투자 구조가 저절로 바뀌지는 않는다.
결국 기업은 어느 쪽이 더 도덕적인지만 보고 상품을 정하지 않는다.
누가 오래 남는가. 누가 더 많은 돈을 쓰는가. 어느 쪽의 불만이 실제 이탈로 이어지는가. 기업은 이것을 본다.
인터넷에서 거센 비판을 받아도 매출이 오르면 기업은 비슷한 상품을 반복한다. 반대로 칭찬이 쏟아져도 매출이 나오지 않으면 다음 프로젝트는 승인받기 어렵다.
이용자의 불편이 고객 이탈이나 매출 감소, 브랜드 이미지 악화, 신규 이용자 유입 저하로 나타나야 기업은 비로소 경영 지표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소비자의 비판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여론은 잠재 고객의 선택과 기업 이미지, 인재 채용, 장기적인 투자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여성 이용자의 불편을 무시하는 이유가 반드시 증오는 아니다.
그 불편을 무시해도 당장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 있다.
시장 논리는 기업의 행동을 설명한다.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증오보다 오래 움직이는 자본과 관성
일부 여성 커뮤니티에서는 게임업계의 남성 편향을 남성 개발자의 여성혐오 하나로 설명하는 목소리가 반복된다.
처음에는 여러 가설 중 하나였다. 반복되는 동안 산업 전체를 설명하는 진실처럼 굳어진다.
반대편도 다르지 않다.
여성은 게임에 돈을 쓰지 않는다. 여성 이용자의 불만은 모두 검열 요구다. 남성 캐릭터가 팔리지 않는 것은 여성 시장이 작기 때문이다. 여성향 게임의 실패는 여성에게 게임 수요가 없다는 증거다.
이 주장도 검증 없이 되풀이되면 어느새 상식이 된다.
하지만 전체 게임 이용자에서 여성의 비중은 절반에 가깝다. 《러브앤딥스페이스》 같은 게임은 여성 중심 고객을 상대로 수천만 명의 이용자와 수억 달러 규모의 추정 매출을 만들었다.
동시에 라이브 서비스 게임과 PC게임에서는 남성 이용자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조사도 있다.
여성 고객은 분명히 존재한다.
모든 게임 시장에 같은 비율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기업 안에도 에코 체임버가 생긴다. 같은 성공 사례와 비슷한 매출 자료만 반복해서 보면 과거에 제대로 공략하지 않은 고객은 미래에도 없다고 믿게 된다.
여성 커뮤니티는 “남자들이 여자를 싫어해서”라는 설명에 갇힐 수 있다. 게임업계와 남성 중심 커뮤니티는 “여성은 게임에 돈을 쓰지 않아서”라는 설명에 갇힐 수 있다.
서로를 비웃지만 이미 가진 경험과 자료만으로 결론을 강화한다는 점에서는 놀랄 만큼 닮았다.
여기서 “양쪽 다 똑같다”고 끝내면 또 틀린다.
소비자의 과도한 일반화와 자본·의사결정권을 가진 기업의 구조적 책임은 무게가 같지 않다. 이용자는 원하는 상품을 요구하고 불쾌한 표현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상품에 수십억 원을 투자하고 어떤 이용자를 배제할지 결정하는 주체는 기업이다.
분명히 하자. 게임업계에 여성혐오와 성차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여성 종사자를 배제하는 조직문화와 온라인 괴롭힘은 실제 연구와 사건으로 확인됐다. 여성 이용자의 문제 제기를 조롱하거나 여성 고객의 요구를 하찮게 여기는 개발자와 회사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게임 대부분이 남성향으로 만들어지는 이유를 모두 개인적 여성혐오에 넣으면 산업이 움직이는 방식은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모든 선택을 시장 논리라 부르며 업계의 편견과 책임을 지워서도 안 된다.
시장 논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연법칙이 아니다.
과거의 조직과 투자자가 누구를 고객으로 선택했는지가 쌓인 결과다.
게임사는 어제 돈을 쓴 고객을 가장 안전하게 본다. 검증됐다고 여기는 장르와 캐릭터, 익숙한 결제 구조를 반복한다.
새 고객의 가능성을 발견해도 조직의 제작 방식과 시장 분석을 바꾸는 위험보다 지금까지 돈을 번 방법을 한 번 더 고른다.
산업을 움직이는 힘은 때로 증오보다 훨씬 평범하다.
자본이다.
관성이다.
과거의 매출표다.
평범한 동기에서 시작된 선택도 특정 집단을 반복해서 배제할 수 있다.
악의가 없다고 책임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세상의 절반은 여자다. 게임을 즐기는 여성도 전체 이용자의 절반에 가깝다.
하지만 모든 여성 게이머가 같은 게임을 하고 같은 캐릭터를 좋아하며 같은 방식으로 돈을 쓰지는 않는다. 그 수가 많다고 여성향 대작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지금 여성 고객의 매출 비중이 낮다고 앞으로도 여성 시장이 작을 것이라 단정할 수도 없다.
현재의 매출표는 자연법칙이 아니다. 기업이 어떤 상품에 투자했고 누구에게 광고했으며 누구의 요구를 먼저 들었는지가 남은 기록이다.
게임업계가 남성향 게임을 반복하는 데는 남초 조직문화와 성별 편견이 작용할 수 있다. 여성 소비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도 있을 수 있다. 남성 소비자의 취향을 더 익숙하고 편안하게 여기는 개발자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수십 년간 이어진 산업의 방향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이미 확인한 고객을 놓치지 않으려는 자본의 본능, 새로운 시장을 다시 배우지 않으려는 관성도 강하게 작동한다.
업계가 여성을 고객으로 보지 않는 것과 공략법을 몰라 외면하는 것은 다르다. 여성을 싫어하는 것과 여성 시장에 투자하기를 두려워하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니다.
다르지만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함께 나타난다.
그래서 게임업계의 성차별을 비판할수록 정확해야 한다.
남초 조직문화를 비판할 때는 의사결정 구조와 노동환경을 말해야 한다. 성적 대상화를 비판할 때는 표현 방식과 이용자 소외를 짚어야 한다.
여성향 게임이 부족한 이유를 분석할 때는 시장 규모와 투자, 소비 구조와 공급의 역사까지 봐야 한다.
모든 현상을 “게임 만드는 남자들이 여자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통쾌하다.
모든 현상을 “여자는 게임에 돈을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편리하다.
통쾌함과 편리함은 정확함이 아니다.
게임사는 여성 이용자를 추상적인 집단이 아니라 서로 다른 취향과 소비 습관을 지닌 구체적인 고객으로 봐야 한다.
여성 커뮤니티도 자신의 경험과 취향이 여성 전체를 대표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게임업계가 에코 체임버에서 나와야 하듯 그 업계를 비판하는 사람도 자신의 에코 체임버를 벗어나야 한다.
세상의 반이 여자라는 말은 출발점일 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중 누가 어떤 게임을 선택하는가.
왜 그 게임을 선택하는가.
그리고 게임업계는 지금까지 누구에게 선택받을 기회를 주었는가.
그 마지막 질문에 답하지 않는 매출표는 시장의 절반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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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엔터테인먼트소프트웨어협회, 2025년. 본문 이미지의 대체 텍스트에는 조사 범위(21개국, 16세 이상, 2만 4,216명)와 결과를 함께 표기했다. ↩
DISCU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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